유영호/창해

 

   
▲ 장수민 사서
평택시립 팽성도서관

코로나19 시대에 산지도 1년이 넘었다. 해외여행은커녕 국내 여행도 가기 힘든 시대에 우리 집 근처에 멋진 여행지가 있다면 참 좋을 것이다. 이 책은 일상적인 공간에 스토리를 입혀 의미 있는 장소로 바꿔주고 아는 즐거움과 역사를 체험하는 추억까지 선물해준다. 

청계천을 출발하여 세종대로 사거리를 훑고 사소문 중 하나인 창의문까지 가는 동안 건물과 집터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준다. 책을 읽는 동안에는 마치 해박한 문화해설사와 동행하는 것 같이 즐거운 여행길이 눈앞에 펼쳐진다. 한양이 개발된 것은 조선창업부터의 일이라 주로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쳐 현대에 이르는 에피소드들이 주를 이룬다.

교보빌딩을 지나가며 교보그룹 창업자가 사기를 쳐서 돈을 마련한 이야기, 종교교회의 이름의 유래, 도렴동·당주동·내수동·내자동·적선동 등 서촌부근 지명이 조선시대 5부 52방에서 유래한 것, 백운동천·옥류동천·청계천 등의 복개 이야기, 영추문인 경복궁 서문만이 콘크리트로 복원된 이유 등 서촌에 사는 사람들도 잘 모를 법한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내가 가본 서촌이 맞는 건가 생각이 들며 어서 빨리 책을 들고 서촌으로 가 책에 나온 지명들을 일일이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커져만 간다.  

하지만 설레는 이야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일제 강점기 조선인 최고 부자이며 친일파인 윤덕영의 벽수산장 안채를 남산골 한옥마을에 대표적인 한옥으로 복원한 것이나 노천명과 서정주의 집이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지정된 내용을 읽노라면 옛날이야기라 재밌기도 하지만 애국지사와 관련된 곳은 흔적을 찾기가 힘들고 기회주의자들의 유산은 아직도 남아 있어서 청산되지 못한 역사의 무거움을 느끼곤 한다. 

이 책은 오직 두 다리에 의지한 채 서촌 일대를 돌며 펼치는 답사기행, 혹은 역사기행서다. 여타 기행서들이 풍광 묘사, 지은이의 사고와 감상 등으로 채워지는 것에 비해, 『서촌을 걷는다』는 답사 지점마다 포인트가 되는 장소를 찾고 그곳에서 일어난 사건과 사연, 역사적 의미를 진보적 관점에서 이야기한다. 현재의 정치·사회적 상황이 아무 이유 없이 생겨난 게 아니듯, 우리의 현재를 알기 위해선 그 뿌리가 되는 과거에 대한 근본적인 관찰과 역사적 상상이 필요하다.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된 서촌의 과거와 현재 모습은 물론이고, 그곳에서 어떤 사건이 있었고 어떤 사연이 숨겨져 있는지를 새로운 시각으로 반추한다. 

어느 하루, 서촌 구석구석을 느릿하게 걸으며 그 안에 숨어 있는 우리 역사와 마주해보는 건 어떨까. 한글 창제의 위인 세종대왕이 태어나고 자랐고, 안평대군이 도화경을 꿈꾸고 안견이 몽유도원도를 그린 곳. 세월이 지나 매국노 윤덕영과 이완용이 떵떵거린 흔적이 여실한 곳. 그런 속에서도 이상, 윤동주, 노천명 같은 숱한 예술가와 보통 사람들이 어우러져 살았던 곳. 많이 뒤바뀌고 사라져버린 것들이 많지만,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이면 역사의 숨결소리를 가늠해 들어볼 수 있는 드문 곳. 이 책은 살아있는 서촌의 역사를 되돌아볼 최적의 생각거리를 던져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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