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3월 17일

강습회 운영기금 마련하기 위해
강연·음악회 겸해, 후원금 쾌척

 

 

“振威郡 平澤里 恩平講習會에서는 經營에 補助하기 爲하여 去 三月 十七日 夜에 音樂講演會를 開하였는데, 演士 金順福 孃은 ‘우리 社會의 두 가지 缺如’이란 題로, 同 金一善 氏는 ‘適者享樂’이란 題로 各各 熱辯을 吐하여 一般聽衆에게 不少한 感動을 與하였고, 樂士 高安維 黃雲鳳 兩孃의 淸雅한 音樂聲은 六百名 聽衆의 喝采를 博하였으며 當日 同 講演會를 爲하여 義捐한 人士는 如左하더라.(생략)”(『동아일보』 1923년 4월 6일)

예나 지금이나 교육기관을 운영하는 데는 규모가 큰 학교든 작은 강습소든 많은 자금이 소요된다. 3.1운동 이후 교육열이 크게 늘어남에 따라 1920년대 평택지역에도 교육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학원이나 강습소 등이 늘어났다. 이는 보통학교가 수요자를 다 충족시키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지역 유지들은 사재를 털어 넣기도 하고 종교시설에서는 부속기관으로 강습소를 설치하였다. 평택역 앞에 있었던 장로교회에서도 강습소를 설치하였는데, 바로 은평강습소였다.

은평강습소는 1922년 11월 인가를 신청하여 그해 말에 인가를 받았다. 그렇지만 개교는 1922년 8월에 이미 하였으며, 학생은 인가를 받을 당시 60여 명에 이를 정도로 제법 규모를 갖추었다. 인가를 받은 후 학생 모집은 크게 늘어나 2백여 명을 증모하기로 하였다. 그렇지만 학생의 증가로 규모가 커짐에 따라 소요되는 운영 자금도 증가할 수밖에 없어 경영에 적지 않은 부담이 되었다. 개교한 지 불과 6개월 만에 후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음악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1923년 3월 17일 개최한 음악 강연회는 600여 명이 참석할 정도 성황이었다. 음악 강연회는 먼저 김복순과 김일선을 초청하여 ‘우리 사회의 두 가지 결여’와 ‘적자향락’이라는 제목으로 각각 강연하였다. 이어 고안유와 황봉운 두 사람의 청아한 노래를 감상하였다. 후원금을 마련하는 이날 강연회에는 윤용섭과 박봉진 20원씩, 최영수 장세만 무명씨 성주한 등은 10원씩, 무명씨 서병훈 안종완 남진우 박상오 원춘식 이포호 이기영 이규한 박귀록 박건양 유수정 이성렬 이학준 등은 5원씩, 안준석은 3원, 윤경득은 2원을 기부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평택지역의 유지들이었다.

저작권자 © 평택시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