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년 7월 18일

황무지 약 25만 5000평 개간
첫해 4개월 생활비 50원 지원

 

 

“仝氏는 性本溫良하고 堅忍不㧞의 氣槪가 多하여 明治三九年에 振威郡 西面 所在 荒蕪地 百七十町步를 購入하여 明治 四十三年 末에 八十五町步의 開墾을 了하고 二個年間 自作을 試한 後 小作主義로 改하였으나 또 스스로 小作人에게 模範을 指導監督한 結果 目下 小作人이 百四十六에 及하였고, 該 小作人으로 하여금 아무쪼록 移住케 할 方針을 取하여 基址를 經하고 道路家戶를 建設한 後 家屋代는 年賦로 償還케 하고 又 移住의 初年에는 一家族에 對하여 約 四個月의 食料로 五十圓을 補助하는데 現今 此의 專門小作人이 約 十戶요 小作人 指導의 方法으로 恆當 獨立自覺의 觀念을 養成하기에 努力하여 小作人의 貯金組合을 組織하고 農閑의 際는 小作人을 集하여 農議會 及 品評會를 開催하며 又 耕作施肥의 方法은 스스로 實地에 就하여 指導하는 故로 小作人과 交情이 圓滿하여 些少라도 怨聲을 洩는 者 無하고 皆同人의 指導下에서 安堵樂業하니 또한 足히써 殖産興業의 獎勵上에 可히 稱揚할 者라하겠더라”(매일신보 1913년 6월 12일)

독행자篤行者란 ‘성실하고 친절한 행위를 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일제강점기 일본인하면 대부분의 사람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이는 ‘야만적 식민통치’에서 비롯됐다. 그런데도 ‘선한 일본인’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인물도 있다. 평택에 정착한 야마다 야키요시山田顯義는 그런 인물이 아닌가 한다.

야마다는 1906년 당시 진위군 서면 일대의 황무지 168만 5950㎡(약 51만평)를 사서 이 가운데 84만 2975㎡(약 25만 5000평)를 4년 동안 개간했다. 평택에 처음 정착할 때의 나이는 25세였다. 출생지를 확인할 수 없지만 야마다는 일본에서 여러 명과 청운의 꿈을 안고 조선에 건너와 정착했다. 이들은 황무지를 개간하고 흥농을 위해 1913년 8월 1일 진위흥농주식회사를 설립한 바 있다.

야마다는 개간한 황무지를 1910년부터 2년간 자작自作을 하다가 소작小作으로 변경했다. 야마다는 146명을 소작인으로 두었는데, 단순한 소작을 경영한 것이 아니라 과학적이고 협동적으로 운영했다. 또한 야마다는 개간지 소작인의 거주처를 저렴한 상환조건으로 마련했으며, 소작 첫해에는 4개월의 생활비 50원을 지원했다. 저축에 대한 인식을 하도록 하는 한편 저금조합을 조직하기도 했으며, 농한기에는 농의회와 품평회를 개최해 흥농에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이와 같은 야마다의 지도와 후원으로 진위군 서면 일대 소작인들에게는 칭송이 자자했다.

야마다는 1923년부터 진위흥농의 지배인이 되었으며, 1921년부터 1927년까지 조선농회 도평의원으로 활동한 바 있다. 이후 야마다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어 궁금한 점이 많다. 앞으로 평택에서 활동한 일본인에 대한 조사가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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